"나를 팔아서라도 결단을 내려라"…장세주 회장과 포항
포항제강소 제2창업 선언...장 회장 진두지휘, 건설 마무리
2후판 폐쇄, 디코일 출시...주요 사안마다 '과감한 결단'
박상효 기자 (s0565@ebn.co.kr)
2016-03-15 06:00:00
▲ 동국제강 포항제강소 생산동 앞에 서 있던 '제2 창업 기념비'ⓒ동국제강
"여기 새로운 철강 생산현장은 '항상 최첨단의 설비와 세계적인 기술로 최고의 제품을 생산한다'는 기업문화가 깃들여 있으며 전체 임직원의 소중한 땀과 헌신적인 희생정신이 담겨져 있는 터전이다."

지난 10일, 동국제강 포항제강소를 방문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동국제강이여 영원하라'고 시작되는 '제2 창업기념비'다. 지난 1998년 부산제강소를 폐쇄하고 과감히 포항을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포항제강소를 선택, 건설한 고 장상태 회장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창립 62주년을 맞은 동국제강은 창업자인 故장경호 회장으로부터 2대 故장상태 회장, 현재의 장세주 회장으로 이어지는 동안 철강 한 우물을 판 기업이다.

동국제강은 1954년 한국 최초의 민간 철강기업이다. 특히, 동국제강의 포항제강소는 고 장상태 회장과 함께 장남인 현 장세주 회장이 1995년 기획조정실장 전무로(1995년~1999년)로 재직하며 밑그림을 그리고 투자를 이끌어 완공한 공장이다.

80년대 말, 동국제강은 부산의 도시 발달에 따라 불가피하게 제강소를 포항에 옮겨야 했다.

이때 장상태 당시 회장은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앞으로 조선산업 등이 성장할 텐데 이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며, 포항에 대규모 후판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결정한 것.

내부적으로 물론 반대가 심했다. 부산에 있는 모든 생산 설비를 옮겨가며 거기에 새로운 공장까지 건설하려면 당시 비용으로 최소 1조 이상이 소요되는 일이었고 역시 앞으로의 수요가 이를 뒷받침해줄 것이냐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하지만 장상태 회장은 “아내의 반지를 팔아서라도 투자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고 장상태 회장이 인천제강소에 국내 최초로 직류전기로를 도입해 성공을 거둔 당시 장세주 전무를 1994년 말 기획조정실장으로 임명하고 동국제강의 제2의 창업을 선언한 포항으로 부른 이유다.

이때부터 장세주 회장과 포항제강소의 인연은 시작된다. 장 회장은 트윈베슬 전기로(두 개의 전기로를 교대로 가동하는 전기로)를 사용하는 신개념 재강공법을 도입하는 등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1995년 본격적으로 포항제강소 건설에 뛰어들었다.

1998년 형강공장, 1999년 봉강공장의 건설까지 포항제강소 설비 하나 하나에 장세주 회장의 손길이 묻어있다.

동국제강은 포항 시대를 열고 제 2도약기를 맞이한다. 포항제강소에 1후판공장, 2후판공장을 준공해 250만톤의 후판생산체제를 갖추고 형강공장 설비를 세계적 수준의 최첨단 설비로 전면 교체하며 결국 포항제강소는 투자가 마무리된 1998년부터 그 후 10여년간 동국제강의 성장동력이었고, IMF이후 대한민국 철강산업 등 중후장대 산업의 부흥을 이끌었다.

▲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이 2001년 9월 회장 취임 하자마자 포항제강소를 방문하고 제2 창업을 선포하며 제2창업비에서 임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사진ⓒ동국제강
특히, 1995년 장세주 기획조정실장이 세계 최대 철강회사(아르셀로미탈)를 이끌고 있는 미탈 회장과 만나 후판설비 도입 협상을 벌였던 일화와 이를 계기로 동국제강, 미탈, 그리고 일본 JFE스틸로 이어진 오랜 우정은 지금도 철강업계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다.

본격적인 포항시대를 연 동국제강은 최첨단 설비와 안정적인 제품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매출이 꾸준히 증가해 1995년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철강업계에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철강도시 포항의 불꽃도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동국제강도 공급과잉과 저성장으로 불황이 장기화되자 포항제강소를 중심으로 하는 사업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장세주 회장은 2015년 5월부터 구속 재판을 받았고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8월 동국제강은 포항제강소의 연산 190만톤 능력의 2후판 공장의 가동 중단을 선언한다.

사실, 그동안 동국제강은 장세주 회장 구속 후 CEO 이야기는 물론, 페쇄한 2후판공장을 포함 포항제강소의 취재를 극도로 꺼려해왔다.

포항 후판사업 철수에 따른 여론 악화 부담과 오너인 장세주 회장이 배임, 횡령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 구조조정까지 해야 하는 동국제강으로서는 '아킬레스건'처럼 포항제강소는 감추고 싶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번의 취재 요청에도 동국제강 홍보팀은 애걸하다시피 취재를 거절했다. 그러던 동국제강이 이번에 코일철근 '디코일' 상업생산을 계기로 제한적으로나마 포항제강소의 문을 연 것.

동국제강의 디코일(DKOIL)의 탄생배경은 지난 2011년 말, 철강업계의 공급과잉으로 새로운 활로 개척이 필요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국제강은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수한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을 만들려면 연구·설비에 막대한 투자를 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 포항제강소 봉강공장의 기존 설비들을 적극 활용해 철강시장에 동국제강만의 경쟁력을 부여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내부에서 개진됐고, 그 첫 프로젝트가 바로 '디코일(DKOIL)’ 다.

▲ 장세주 동국제강그룹 회장
'디코일'의 투자 역시 장세주 회장의 뚝심에서 시작됐다.

동국제강의 코일철근인 '디코일'사업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동국제강은 주력 철근 공장인 인천제강소를 두고 포항에서도 철근을 또 생산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한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을 때 장회장은 또한번 결단을 내린다.

장세주 회장은 포항의 철근공장을 특화할 방안으로 코일철근 투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

장 회장은 "불가피하게 포항 후판사업은 철수하지만 철근 공장만큼은 지켜내야 한다"며 "후판과 철근 사업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워도 투자를 게을리하지 말라"며 옥중에 있으면서도 특명을 내렸다.

이처럼 장세주 회장의 동국제강, 특히 포항제강소의 애정은 각별하다.

앞서 동국제강이 지난해 6월 2후판 공장 가동중단을 발표할 때도 동국제강 측에서는 장회장과의 관련을 공식적으로 노코멘트로 일관했지만 이 결정에 장 회장의 결단이 있었다.

후판 공장 구조조정에 대해 장세주 회장과 경영진들은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회사가 살려면 특단의 결단을 해야 하는데 나 때문에 못하면 안된다"며 " 차라리 나를 팔아서라도 결단을 밀고 가라"고 힘을 보탠 것.

여기에 "공장 현장직 직원들은 최대한 회사가 안고 가라"는 지침을 내린 후 곧바로 장세주 회장은 동국제강의 이사회에서 물러났고 동국제강은 대대적인 조직 쇄신과 함께 2후판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장세주 회장의 지시를 받들어 2후판 공장의 협력업체 직원들까지 모두 챙기지는 못했지만 동국제강은 직영직원 100% 고용 승계 원칙을 고수했다.

장세주 회장은 기업 오너 3세로 1978년 동국제강에 사원으로 입사,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무려 23년간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직원들과 부대끼며 기업문화를 익히고 애환을 직접 경험했다. 경영수업을 받는 동안 그는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족구 경기를 뛰고 저녁엔 술잔을 기울였다.

포항제강소에서 만난 한 직원은 "장세주 회장님은 그 시절, 직원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며 어울렸다"며 "오너로서 특별대우는 커녕, 친밀한 유대관계는 동국제강이 특유의 노사화합문화를 유지해 가는데도 큰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한 때 2후판 공장과 함께 '셧다운'까지 고민했던 포항 봉강공장이 지난 2월 18일부터 상업생산에 돌입해 현재는 쉴새없이 코일철근을 감아내고 있다.

"모든 임직원들이 '목숨과도 바꾸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만든 포항제강소의 최첨단 설비도 이 상태에서 만족한다면 머지않아 낙후될 것이므로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진보에 따라 개혁과 개선을 서슴없이 실천하라… "

처음 찾은 동국제강 포항제강소를 나오면서 다시 '제2 창업기념비'를 유심히 읽다보니 장세주 회장과 함께 여러 감흥이 겹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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